Humanity is stuck in short-term thinking. Here’s how we escape

단기적 사고 방식에서 탈출하려면

미래 감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확대되기도 하고 수축되기도 한다. 생존이란 사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충격에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가끔 딸에게 미래에 대해서 물어본다. 딸아이가 세 살 때는 시계나 달력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기본적인 시간 개념만 알고 있었다. 아이는 일주일 넘게 먹이를 먹는 생명체를 소재로 한 고전 동화 ‘배고픈 애벌레’를 이해하기는 했지만, 나한테 얘기를 들려줄 때는 날짜를 헷갈리곤 했다. 아이에게 시간은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딸은 어제가 어떻게 자기 뒤를 따라왔고, 내일은 어떻게 앞으로 펼쳐 있는지 이해했다. 어느 날 아침을 먹으면서 딸에게 얼마나 먼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10살까지”라고 대답했다. 아이의 머리에 내일이라는 시간은 있었지만, 5년 뒤의 일은 앞이 캄캄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 애가 이제 일곱 살이다. 최근, 내가 아이에게 미래에 대해 얼마나 자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자주는 안해.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길지 가끔은 걱정돼”라고 말했다.

“무슨 걱정?”

“다친다거나 체포된다거나 뭐 그런 거”

“아빠 엄마 나이가 똑같은 거 알아?”

“아니”

“십대가 되는 거 생각해 본 적 있어?”

“응”

“네 아이가 있다는 거 상상해 본 적 있어?”

“소름 돋아”

한살 한살 나이를 먹을수록 딸은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상상 속에 채워 넣는다. 자라면서 겪을 문화는 아이가 그려갈 도화지의 많은 부분을 채울 것이며, 어디서 무엇을 선택할 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아이가 최근 나에게 이랬다. “싱귤레이션(Singulation)은 미래에 사람들이 비참하게 사는 곳이야. 그리고 누군가 “그래서 어쩌라고?” 묻겠지. 로봇이 온 세상을 점령하는데”

“잠깐만. 너 지금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고 했어? 그런 단어는 어디서 배웠어?!”

“빰빠라밤 빤스맨(Captain Underpants)에서” 아이가 대답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시간에 대한 인식도 넓어지듯이, 우리 종족도 이제 천 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인류 이전의 조상은 먼 미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단지 현재에서만 살고 있을 뿐이었다. 도구를 휘두르는 호미닌에서 거대한 도시의 건축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궤적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우리의 시간 감각과 맞물려 있다. 다른 동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미래를 심도 있게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으며, 우리의 삶은 측량할 수 없는 길고 긴 연대기에서 잠깐 스쳐가는 한낱 섬광에 불과하다는 놀라운 진실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이런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상생활에서 활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후손들이 만약 21세기 문명의 병폐를 진단한다면, 단기주의(Short-termism)라는 위험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즉 현재를 벗어나서 앞을 더 내다보지 못하는 집단적인 실수 말이다. 세상은 정보로 넘쳐나는 상태이고, 생활수준은 사상 유례없이 높아졌지만, 뉴스 거리나 정치 용어, 사업 분기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갖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왜 이렇게 “지금”에 갇혀 있을까?

예전 같지 않은 미래

시간을 개념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은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에 우리 조상은 진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정신적 시간 여행”을 개발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과거의 장면을 재현하고 등장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극장을 마음 속에 지을 수 있다.

초기 인류에게는 이러한 재능이 있었지만, 미래를 더 깊이 생각해보는 개념은 초보 수준에 불과했다. 서구적 사고방식에서는 적어도 중세까지는 그랬다. 수세기 동안, 시간에 대한 순환적 시각은 계절과 왕국을 바라보는 시간을 지배했다. 그 시간대를 넘어서, 미래에 기대되는 유일한 주요 변화는 종교적 가르침인 계시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연장된 현재 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루시안 홀셔(Lucian Hölscher)는 2018년 발표한 에세이에서 “중세에 대부분의 인간사는 파종과 수확, 질병과 건강, 전쟁과 평화, 왕국의 흥망성쇠 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형태였다. 최소한 이 세상에 장기적인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뭔가 연장된 현재 같은 곳에서 살았다”라고 했다.

이러한 장기적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관점을 확대 시킬 필요가 있다. 그 어느때 보다도 우리의 행동은 미래에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중세의 성당 건축가들은 대를 이어 유지될 수 있는 견고한 구조물을 만들 장기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탁월한 선견지명을 기반으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해내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건축가들이 떠올린 내일의 세계는 현재와 같아서, 변함이 없으며 이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서양에서는 18세기가 되어서야 시간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1700년대에 지질학자 제임스 허튼(James Hutton)은 스코틀랜드 바위에 쓰인 연대기가 어떻게 과거로 수백만년 거슬러 올라갔는지 보여주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앞으로 수백만 세기가 펼쳐져 새로운 세계와 세계 질서가 생성될 것”이라며 “창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작가들은 미래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1770년 루이 메르시에(Immanuel Kant)는 25세기를 이상화한 파리에서 깨어나는 한 남자에 관한 유토피아 소설 L’An 2440을 출간했다. 카톨릭은 이 책을 금서로 정했고, 스페인에서는 왕이 직접 불태웠다고 한다.

그 후 200년 동안, 상상이 가능한 과학적이면서 지적인 시간 연장으로 우리와 지구를 이해하는데 장족의 발전을 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덕분에 다윈은 진화론을 제시할 수 있었고, 지질학자는 지구의 진짜 나이를 탄소로 측정할 수 있었으며, 물리학자는 우주의 팽창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었다.

시간에 대한 깊이 자각하는 것과, 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사뭇 다르다. 멀지만 밝은 미래에 대한 18세기 유럽식 고찰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과 같은 위기를 자주 겪으면서 관점은 주기적으로 짧아졌다. 홀셔는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초반까지의 글에서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대한 낙관적이고 광범위한 예측이 미래를 더 신중하게 묘사하도록 했고, 생활 수준의 단기적인 개선과 다음 단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세기 초 희망찬 미래를 예측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미래 감각은 유사한 수축이 일어났다고 홀셔는 주장한다.

<역사의 정권> 저자이며 역사학자인 프랑수아 하르톡(François Hartog)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또 다른 단축의 중심에 있다. 하르톡은 1980년대 후반과 세기의 전환기 사이 어느 시점에서, 사회 트렌드가 융합하면 하르톡이 현재주의(Presentism)라고 부르는 새로운 시간 체제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고 주장한다. 하르톡은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인식, 즉 찰나의 횡포와 끈임 없는 쳇바퀴 같은 생활에 의해 단번에 특징지어지는 현재”라고 정의한다. 21세기에 “전진하는 발걸음을 인도하는 빛나는 지평선이 아니라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라고 쓰고 있다.

우리가 현재 단기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문명의 규모로 실제 검증하기는 어렵다. 미래 역사가들의 견해는 더 분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장기적 사고 부족을 우리는 여전히 인지할 수 있다.

사업, 포퓰리즘 정치, 그리고 기후변화, 유행병, 핵전쟁, 항생제 내성과 같은 장기적 위험에 대처하지 못한 집단적 실패에서 단기주의를 볼 수 있다.

분기별 보고 때문에 CEO들이 장기적인 발전보다는 단기 투자자 만족을 우선시하도록 권장하는 기업에서 단기주의가 목격된다. 지도자들이 국가의 장기적 안녕보다 다가오는 선거와 선거 기반에 대한 욕구에 더 집중하는 포퓰리즘 정치에서도 볼 수 있다. 기후변화, 유행병, 핵전쟁, 항생제 내성 같은 장기적인 위험에 대처하지 못한 집단적인 실패에서도 보인다.

이러한 장기적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관점을 확대 시킬 필요가 있다. 그 어느때 보다도 우리의 행동은 미래에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옥스퍼드대 철학자 토비 오드(Toby Ord)가 주장했듯이, 미래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은 아직 예지력이나 지혜와 부합되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는 단기주의적 사고방식을 조성하는 여러 가지 힘이 있을 수 있다. 누구는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는 재앙, 즉 인터넷을 지적한다. 또 누구는 24시간 종일 계속되는 뉴스와 정치권이 서로 맞닥뜨리는 면에 대해서 개탄하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의사 결정권자들은 다음 세대를 걱정하기 보다 뉴스 헤드라인이나 선거에 더 집착하도록 부추긴다. 하르톡은 20세기 후반까지 서구 문화를 지배했던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적 규범을 탓한다. 이 기간 동안 “기술 발전이 계속 진행되고 소비 사회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더불어, 이 사회가 겨냥한 현재라는 카테고리는 어느 정도 특별한 상표처럼 되었다”고 하르톡은 기술했다.

많은 질병에서 볼 수 있듯이, 원인이 하나인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러 개가 합쳐져야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다. 만약 이런 설명이 정확하다면, 단기주의는 문화, 경제, 기술적 순간이 불시에 출현하는 특성(창발성: Emergent Property)이다. 영원히 지속될 필요도 없고, 완전히 통제불가능하지도 않다. 사물이 항상 오늘날과 같은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는 가정은 사실 그 자체가 현재주의의 한 형태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우리를 단기주의로 조금씩 몰아가는 심리적 압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압박을 떨쳐낼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스트레스(Temporal Stress)

최근 MIT에서 펠로우십을 하는 동안, 나는 미래에 대한 심리적인 경험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연구했다. 일상 생활에서 먼 미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했다. 또한 어떤 심리적 압박 하에서, 일상적인 결정을 장기적인 관점으로 할 수 없는지 알고 싶었다. 이러한 압박을 “시간 스트레스”라고 부른다.

몇 가지 주제가 계속해서 떠올랐는데, 편리하게 약자를 붙였다.

S – 핵심성(Salience)
H – 습관(Habits)
O – 과부하(Overload)
R – 책임감(Responsibility)
T – 목표(Targets)

먼저, 핵심성(Salience)에 대해 알아보자. 인상적이고 정서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울림을 주는 사건은 추상적인 사건보다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최근 사건을 통해서 미래를 상상한다는 의미의 인지적 편견인 “가용성 편향(Availability Heuristic)”의 단면을 보여준다.

지구 온난화처럼 느릿느릿 서서히 진행되는 문제들은 무언가 불에 타거나 물로 넘쳐나기 전까지 경보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에는 질병학자들조차도 코로나바이러스 보다는 에볼라, 지카 같은 핵심적인 바이러스에 더 관심을 쏟았다.

깊숙이 자리 잡았지만 보이지 않는 습관(Habits)이 여기에서 한몫을 한다. 정치적 논란, 범죄, 문화 전쟁, 재난 또는 공격을 휴대폰으로 훑어보고 있을 때, 현저성의 단축 효과를 극복하기란 더 어렵다. 이러한 사건들은 중요하지만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불균형하게 채워준다.

단기주의적 행동은 조직에 골칫거리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보스턴 소재 싱크탱크인 FCLT글로벌(FCLT Global)은 최근 기업의 행태를 조사하고, 이사회가 장기 전략 대신 컴플라이언스에 집중하거나 주주들이 장기 계획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도록 경고했다. 회사의 장기 원칙을 주주들에게 정기적으로 전달하는 아마존(Amazon) 제프 베조스(Jeff Bezos)와 같이 기존과 다른 관습을 확립하는 기업인은 직원과 투자자 사이에 더 장기적인 안목을 육성하는 문화를 조성할 수 있다.

이 모두를 복합적으로 만드는 것은 서로 연결된 세상이 과부화(Overload) 되었다는 점이다. 기술 변화 가속화와 이 가속화가 정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굳이 연연할 필요는 없다. 만약 관련 증거가 필요하다면, 미국 인구의 절반이 전화기를 사용하기까지 무려 71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음을 생각해 보자. 그러나 휴대폰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불과 14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인터넷은 어떤가? 10년이면 충분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가속화됨에 따라, 생명, 업무, 정보도 덩달아 속도가 빨라졌고 우리의 신경은 더욱 과부화상태가 되었다. 2005년에 수행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미래는 약 15년에서 20년 후에 어두워질 것으로 전망했다. 우주론자인 마틴 리스가 지적했듯이, 아이들은 우리와 전혀 근본적으로 다른 삶을 살 것으로 예상할 때, 장기적인 생각으로 미래를 내다보았던 ‘성당 사상가’가 되기란 어렵다. 장기적인 생각은 중세시대 조상으로서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던 문제였다.

21세기 가속화되는 사회에서 사람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Responsibility)도 희석되었다. 현대 세계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더 쉽게 결과나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햄버거를 예로 들어보자. 세계적인 체인점의 소비자는 햄버거가 테이블에 올라오기까지 관련된 온갖 병폐(탄소 배출, 공장식 농장, 수질 오염 등)에 대해서 극히 일부의 책임만 공유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처럼 느릿느릿 서서히 진행되는 문제들은 무언가 불에 타거나 물로 넘쳐나기 전까지 경보 레이더에 포착되지 않는다.

커뮤니티 규모가 작고, 상품을 지역에서 얻으며, 사회적 의무가 더 구체적이었던 시절에는 상황이 달랐다. 수 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은 기업형 농장으로 인한 피해나, 방사성 폐기물, 바닷속 플라스틱, 대기 중 탄소, 또는 단체로 책임져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잘못이 없는 악질적인 병폐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단순한 세상에서도 문명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천연자원을 다 소진하면 붕괴되고는 했다.) 책임을 더 분명하게 하고, 결정적으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을 방법이 필요하다.

마지막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시간 스트레스는 바로 목표(Targets)이다. 오늘날 지표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성장 통계, 효율성 점수, 주주 수익, KPI, GDP, ROI까지 말이다. 계획이 엉성하면, 이런 목표는 현재주의를 조장하거나 나쁜 행동을 부추긴다.

사회학자 로버트 자칼(Robert Jackall)은 이런 일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시나리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자칼은 “공장 쥐어짜기”라고 했다. 이 시나리오에서 책임자는 이사회에서 야심찬 목표를 세우고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을 몰아붙인다. 생산성은 높아진다. 몇 달 후 목표를 달성하면, 책임자는 승진하거나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근로자들은 불만이 가득하고 기계는 바닥에 처박혀 엉망진창이다. 다음 책임자는 새로운 단기 목표로 뒷수습에 나서고 이 사이클은 계속 반복된다.

지표와 관련된 문제는 영국의 경제학자 이름을 딴 굿하트 법칙(Goodhart’s Law) “조치가 목표가 되는 순간, 좋은 조치가 되지 못한다”라는 문구에서 볼 수 있다. 단기주의를 벗어나려면 성공을 가늠하는 목표를 재평가해야 한다. 장기적인 사고를 장려하는가, 아니면 현재의 이익만을 우선 순위에 두는가?

우리는 기업이 전년대비 또는 분기별 목표와 평생 지속되거나 심지어 초과되는 장기적 목표 간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마치 일부 정유 회사가 배출가스 순 제로를 공약하는 것처럼 말이다. 직업, 교육, 또는 가족 목표를 통해 어느 정도 개인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등 수십 년 또는 수세기를 넘나드는 지표를 정의하기 위한 시도도 정치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전 세계의 법과 기업 정책에도 스며들었다. (예를 들어 웨일즈는 미래세대의 복지에 관한 법(Well-being of Future Generations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를 대략적으로 참고했고, 공공 기구는 의사결정시 특정 장기 목표를 포함하도록 한다.)

시간 스트레스와 싸우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목표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진부한 문구로 표현하자면,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은 과대평가하고 한 세기에 걸쳐 이룰 수 있는 것은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역사의 중심점

삶에서 단기주의를 조장하는 시간 스트레스를 규명하는 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금세기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시간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의 지평은 전보다 짧아졌지만, 다시 넓어질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현재주의는 더욱 극단으로 치달았지만, 문화적 규범도 난관에 봉착했다. 우리가 진짜 바라는 미래는 무엇일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오기나 할까.

어떤 이는 우리가 인류의 앞날에 독특하게 영향을 미치는 “역사의 중심점”에 살고 있을 지 모른다고 한다. 그 어느 때도 사람이 만든 위험으로 인해 자멸을 초래할 가능성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다. 핵무기에서 생물학적 테러 병원균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만약 장기적인 계획을 수용함으로써 이 시기를 헤쳐나갈 방법을 모색한다면, 다른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인류도 오랜 시간 생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시간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내 딸 또래의 아이들처럼 발전했다면, 우리의 시간적인 성숙은 아직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사춘기 같은 격동기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을까. 세월이 흐르면 미래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다. 십대들이 어느 날 갑자기 본인 행동에 대한 결과에 직면하듯이, 우리는 현재 단기주의가 초래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충격 정도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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